김창옥 장로님은 1911년 3월 4일 전남 화순에서 출생하셨습니다. 무척 어려웠던 가정의 형편 때문에 유년 시절에는 농사를 지으셨고, 초등학교만큼은 졸업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늦은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6년의 학업을 마치셨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신 뒤, 목포로 이주하신 김창옥 장로님은 연동 바닷가에서 작은 생선가게를 운영하셨습니다. 어느 날 새벽,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일찍 일어나신 장로님은 그 종소리를 따라 연동교회로 찾아오셨습니다.
연동교회는 1928년, 양동교회에서 연동, 산정동, 용당동의 교인들을 위해 분립하여 세운 교회였고, 1938년 초대 담임목사 이남규 목사님이 부임하시기까지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님의 당회권에 속해 있었습니다.
김창옥 장로님은 민족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이신 박연세 목사님께 신앙을 배우셨고, 무척 온화하고 조용한 성품이셨지만 교회 일에는 누구보다 헌신하셨기에 1932년 22세의 청년으로서 교회의 장로로 장립되셨습니다.
1938년 3월, 연동교회의 초대 담임목사로 이남규 목사님이 부임하셨지만, 그해 9월 일제의 강요 아래 조선장로교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습니다. 1940년, 일제의 어용단체인 기독교조선교단은 신사참배를 반대하신 이남규 목사님의 목사직을 박탈하고, 연동교회를 폐쇄하였습니다.
이에 연동교회는 김창옥 장로님이 앞장서 일제의 횡포에 반발하며 신사참배를 반대하였고, 1942년 11월, 일제는 이남규 목사님과 김창옥 장로님 등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사들을 체포하여 목포형무소에 가두고 온갖 고문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듬해 3월, 고문으로 건강이 위독해지신 장로님은 가출옥하셨으나 1943년 3월 21일, 병원으로 향하는 인력거 안에서 33세의 일기로 순교하셨습니다.
김창옥 장로님의 유해는, 신사참배 거부로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 기도하시던 모습으로 동사하여 순교하신 박연세 목사님의 유해와 함께 목포 산정동의 목포공동묘지에 안장되었습니다.
최명길 목사님은 1907년 9월 11일 신안군 도초면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셨기 때문에 배움이 간절해도 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던 목사님은 서울로 상경해 노동판을 전전하며 주일이면 승동교회에 출석하셨습니다. 목사님은 교인이 경영하는 상점에 취직했고, 그 주인은 성실한 청년 최명길을 중등학교 과정인 경성상업전수학교에 보내주었습니다.
목사님은 32세에 신학교 진학을 계획했지만, 고향의 지남교회로부터 전도사로 부임해 달라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와 지남교회, 수향리교회, 수다교회, 세 교회에서 목회하던 중 1939년 신사참배 거부로 체포되어 교도소 생활을 하셨습니다.
목사님은 1942년 조선신학원에 입학하시고, 1945년 전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뒤, 고향의 교회들을 섬기다가 1947년 목포연동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셨습니다. 최명길 목사님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목포역 주변에 모여 살던 나환자들의 양식과 거처를 마련해주기 위해 힘쓰셨고, 가끔 입던 옷까지 벗어주어 속옷 차림으로 돌아오는 날도 종종 있었습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목포가 공산군에 함락되기 직전, 교인들을 어디로 피난시켜 보호할 것인지 의논하던 당회를 마친 다음이었습니다. 최명길 목사님은 김개수 장로님과 ‘잘 죽읍시다.’ ‘예, 그럽시다.’ 인사를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헤어지셨다고 합니다.
최명길 목사님은 제헌국회의원이었던 친구 임기봉 목사님이 부산으로 가는 마지막 피난선에 승선할 것을 권유했지만 ‘내가 양들을 두고 가면 양들은 누가 돌봅니까?’ 말씀하며 뿌리치셨습니다.
목사님은 영암군 삼호면 둥근섬에 예배 장소를 마련하고 교인들과 함께 예배를 이어가시다, 7월 31일 부두에서 교인들과 함께 배를 기다리시는 도중 체포되어 삼호면 지서로 끌려가셨습니다. 교회의 대표를 자처하여 고문실에 끌려가신 목사님은 옆방에 투옥된 교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5시간 동안 고문을 받으면서도 비명을 지르지 않으셨습니다.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목사님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는데, 마침 공산군과 친분이 있던 삼호면의 서길수 집사님을 통해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이전부터 공산주의에 협조적이었던 서길수 집사님은 공산군이 목포를 점령했을 때, 죽게 된 사람들을 많이 살렸다고 합니다.
서길수 집사님은 최명길 목사님과 목포연동교회 교인들이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8월 1일 아침 일찍 삼호 내무소에 찾아가 전원을 석방시켜 자신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가마니로 만든 들것에 걸을 수 없는 상태의 최명길 목사님을 태우고 서길수 집사님의 집으로 가는 길에서, 목사님이 잠시 길을 멈추라고 하시더니 ‘아하, 좋다.’라는 말씀을 세 번 하셨다고 합니다.
그날 밤 저녁 8시경, 목사님은 교인들과 함께 마지막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예배 후 교인들이 목사님께 물었습니다.
“사모님과 자녀들이 오면 무어라고 할까요?”
목사님은 ‘뒤로 오라’고 말을 전하라 하신 다음, 9시경, 43세의 일기로 순교하셨습니다.
목사님이 순교하셨지만, 관을 만들 수 없었던 교인들은 서길수 집사님의 집 주변 대나무를 베어 관을 만들고, 그 집의 텃밭에 목사님의 유해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가족들은 최명길 목사님의 유해를 고향인 도초면 지남리의 큰 형님 밭으로 옮겨 안장하였습니다.
김개수 장로님은 1900년 4월 6일 전남 장흥에서 출생하셨습니다. 15세가 되기 전 부모님을 여의고 고모 댁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신 장로님은 목포로 이주하고 생선 판매를 하시다 수산물가공업체를 설립해 경영하셨습니다.
김개수 장로님은 생선을 인수하던 한 상인에게 ‘베드로도 당신과 나처럼 생선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난 뒤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후 예수님에 관심을 갖게 되신 장로님은 신사참배에 항거하신 양동교회의 박연세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양동교회가 연동교회를 설립한 이후에는 연동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가시다가 1932년 집사 직분을 받고, 1940년 장로 장립을 받으셨습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신 장로님은 목포연동교회가 폐쇄되자 초대 담임목사셨던 이남규 목사님과 함께 무안군 일로면의 상리교회에서 신사참배 없는 예배를 드리셨습니다.
순교하기 전까지도 주일학교의 교장으로 섬기신 장로님은 목포의 부녀자들과 청년을 위한 야학당을 개설하여 민족교육에 힘쓰셨고, 대한청년단의 단장으로 추대되어 공산주의에 맞서셨습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 목포를 점령한 공산군에게 기독교인이자 애국지사였던 김개수 장로님은 숙청대상 1호였습니다. 김개수 장로님은 공산군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으셨고, 가족들 역시 반동 가족으로 체포되어 대성동 성당에 감금되었으며, 부인이신 안장례 권사님은 만삭의 몸으로 전기고문까지 받으셨습니다.
1950년 9월 27일 밤, 연합군의 목포항 상륙을 앞두고, 공산군은 퇴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개수 장로님을 위시한 애국지사들을 트럭에 싣고 대박산 총살 현장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날 밤 대박산에는 요란한 총성이 그치지 않았고, 그곳에서 머리와 허리에 총상을 입고 순교하신 김개수 장로님의 시신이 발견되었는데, 마치 잠자는 것 같이 평안한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그때 김계수 장로님의 가족들 역시 감금된 상황이라 교인들은 가족들이 없는 가운데 조촐하게 영결 예배를 드리고 장로님의 유해를 대박산 기슭에 안장하였습니다. 이후 장로님의 유해는 전북 완주군 고산면 성재리 764번지에 안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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